가습기 살균제로 보는 소비자 피해 구제제도의 허술함

2011년 4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중증폐렴 임산부 환자의 입원이 증가하고 있다는 신고와 조사 요청이 질병관리본부에 접수됐다. 이후 2011년 8월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폐 손상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확실한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제품 수거에 나서지 않았다가 그 해 11월, 역학조사와 동물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 등에서 파는 6가지 제품에 대해 위해성이 확인되었다며 수거에 나섰다. 또한 2012년 2월에는 동물실험 결과를 발표하며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이 확인되고 제품 수거 명령 및 판매 중단이 내려졌음에도 기업을 상대로 한 제제는 수천~수 백 만원의 과징금 부과에 그쳤다. 가습기 살균제의 위해성이 명백해졌음에도 기업에 대한 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구제 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2012년 1월 국가와 살균제 제조·판매업체들을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그해 8월에는 유족 8명이 옥시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 및 판매사 10곳을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2013년 2월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피해조사 결과가 나와야 조사할 수 있다며 기소중지 결정을 내렸다.

이번 사건에 대해 옥시는 5년 만에 뒤늦은 정식 수사와 사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 5년 만의 늑장 사과를 비판하는 질문에 옥시 측은 완전한 보상을 위한 때를 기다렸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옥시는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야 사과에 나섰다. 이들은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를 2001년부터 제조·판매하는 과정에서 '유해 가능성'에 대한 회사 내·외부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했다. 또한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한 보건당국의 조사 결과를 반박하는 보고서까지 조작한 의혹을 받고 있다. 옥시의 도덕성과 기업윤리에 대한 비난은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져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약사들까지 개비스콘, 스트렙실 등 옥시의 일반의약품을 팔지 않겠다고 나서고 있다.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제조·판매 업체의 과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낸 국가배상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법원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국가가 유해물질 관리·감독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를 통해 정부의 책임을 규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기존 판결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정부 차원의 피해자 조사의 경우 2013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나서야 시작됐다. 정부는 2013년 7월~2014년 4월, 2014년 7월~2015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사를 벌였다. 조사를 통해 정부는 221명을 공식 피해자로 인정했고, 이 중 95명은 사망 피해자로 분류했다. 이후 피해자들은 피해 신고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환경부는 2015년 12월 31일로 신고를 마감했다. 이후 사건이 사회 이슈로 부상하자 환경부는 2016년 5월부터 4차 피해자 신고를 받겠다고 밝혔다.

이번 옥시 사건으로 외국 기업들이 국내 소비자들을 ‘호갱’ 취급한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외국 기업이 한국 고객을 ‘호갱’ 취급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경유차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사건을 일으킨 독일 폴크스바겐은 최근 미국에서 현금 보상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리콜 계획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은 상황이다. 또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개인정보 2400만여 건을 보험사에 팔아 수백억 원의 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는 홈플러스의 본사 영국 테스코 역시 소비자 배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 소비자들을 업신여기는 이유는 허술한 소비자 피해 구제 제도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 때문이다. 먼저, 집단 소송제의 경우 다수의 소비자가 같은 피해를 봤을 때, 일부가 제기한 소송의 효력을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이는 소비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부담을 막아줄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에 한해서만 소비자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소송에는 무조건 원고로 소송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를 보고도 소송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대부분이다.

▲ 사진출처 Money week
다음으로 피해자의 요구가 있을 때 기업이 관련 문서를 모두 제출하도록 하는 ‘문서 제출 명령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제도가 미국에서는 원칙적으로 적용되는 반면 국내에서는 기업이 원칙적으로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요청을 법원이 인정한 경우에만 기업으로부터 필요한 문서를 받을 수 있다. 관련 문서를 얻지 못한 피해자들은 피해 입증이 어려워지고, 승소할 확률도 적어진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영국 등은 기업의 행위가 악의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잘 발달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의 갑질이나 개인정보 이용 등에만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다. 그 외의 사건은 배상액이 턱없이 적은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겨도 손해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소비자 피해 구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은 자주 나왔다. 하지만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라는 이름 아래 번번이 무산됐다. 기업들에 비윤리적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이번 옥시 사건과 같은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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