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네이버영화
 2016년 2월 개봉한 영화 귀향. 개봉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영화여서 개봉 하자마자 바로 보러 갔다. 생각보다 많이 자극적인 장면들로 인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위안부가 이정도였나?’라는 생각이 들며 한참을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여운을 잊지못해 위안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찾아보게 되었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이 사건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그분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길 바라며.

 정신대 그 지옥의 시작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년발발)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늘어나는 주민강간과 성병을 막고 사기를 증진시키겠다는 목적하에 일본은 ‘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경이지만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인 1937년 이후 부터였다고 한다. 처음엔 일본여성들이 자원하여 시작되었는데 효과가 좋다고 생각한 일본이 우리나라, 중국, 동남아시아 여성들까지도 속이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대부분이 10대였으며 그들은 하루에 평균10에서 많게는 30명의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왔다. 위안소는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위안부 여성들은 1~2주에 한 번씩 성병검사를 받아야 했다.

 돌아온 뒤 힘들던 삶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군들은 ‘위안부’를 숨기기 위해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거나 각자 힘들게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반겨주었을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들 스스로가 가족들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갔다. 1992년부터 정부에서 피해자 신고센터를 운영한 결과 2003년 200여명이 피해 사실을 신고하였고 북한에도 200 명이 넘는 신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있는 만큼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영화 ‘귀향 ’이후

위안부의 내용을 그린 영화 ‘귀향’은 처음엔 제작비도 어느 무엇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는 끝까지 감동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제작 후원금을 마련해준 7만 5270명의 많은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나는 한 번 더 울컥함을 느꼈다.

“국민이니까, 이 나라 국민이니까. 누구나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스태프로 참여하던, 배우로 참여하던, 관객으로 참여하던.”

-배우 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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