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농사일기

 고추다듬기
늦가을 단풍은 산이나 도로가, 가로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해 있는 곳이 어디든, 그것(단풍, 물들기)은 여름을 정리하고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에게 다 다가온다. 우리 텃밭도 그렇게 물들고 있다. 올해 처음 심은 마는 여러 색깔로 물들면서 이파리를 하나 둘 떨군다. 올해는 좀 게을러 김매는 것을 소홀히 하였는데, 내가 키우지 않은 풀들도 무성한 채 색깔을 무겁게 바꾸고 있다. 이미 한참 철이 지났지만, 그대로 세워놓은 키 큰 옥수수 대도 말라가는 모습이 다른 것들과 어울려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우리 밭에는 한 해의 삶을 차분하게 마감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배추나 무처럼 늦게 심어져 한창 자라는 것들도 있다. 이것들은 추위가 밀려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라기 위해 서두른다. 장인어른이 어디선가 얻어 밭 한가운데 심은 국화는 제 꽃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로 자라, 두꺼운 철사로 지지를 해 주어야 했다.

 
  밭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살아있음이다. 난 그것을 바라보고 같이 어울리면서 더불어 살아있다. 변화하지 못하고, 고정적이고, 획일적인 도시문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마나 밭에 가는 것에서 조금이나마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것마저 없다면, 내 몸과 마음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갈 것이다.

  늦가을에도 새로 심어야 하는 것이 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지난 토요일 고구마를 캤다. 아이들도 같이 했다. 녀석들도 평소 밭에 가는 것을 즐기지만, 농사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는데, 고구마 캐는 것을 시키니 뜻밖에도 끝까지 같이 했다. 땅속에서 무더기로 박혀 있는 고구마를 하나하나 캐내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누가 제일 큰 것을 캐나 시합을 했는데, 작은 녀석이 어른 팔뚝만한 것을 캐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녀석은 고구마를 다 캔 다음, 이것을 박스에 담아 옮길 때도, 한 박스를 가뿐하게 들고 갔다. 거기서 녀석이 큰 것을 새삼 느꼈다. 내년에는 농사일에 여러 모로 쓰일 데가 많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국화와 배추
  일요일에는 파란 고추를 땄다. 내가 심은 고추는 농약을 하지 않는 탓에 이미 오래 전에 탄저병으로 망해 다 뽑아버렸고, 장인어른이 심은 고추를 땄다. 이것도 탄저병이 들긴 했어도, 막상 따고 보니 양이 무척 많았다. 초고추를 담기 위해 작은 단지 하나를 갖고 갔는데, 어림도 없었다. 생각을 바꿔, 작년 김장김치를 넣어 땅에 묻었던 커다란 항아리에 담기로 했다. 먼저, 고추 꼭지를 적당히 자르고, 몸통에 이쑤시개로 구멍을 내 항아리 안에 재운 다음, 그 위에 옥수수 대 여러 개를 얼기설기 놓고, 그 위를 개울에서 주워온 돌로 눌렀다. 다음으로, 식초, 간장, 설탕, 소주를 각각 같은 양으로 섞은 물을 끓여 식힌 다음, 고추를 재워놓은 항아리 안에 부었다. 앞으로 두 번 더 다시 항아리 물을 끓여야 한다. 그래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양은 처음 해 보는 것이라, 과연 잘 될까 약간의 의심은 생겼지만, 직접 해 보는 뿌듯함이 컸다. 초고추를 담고도 고추가 많이 남았다. 이번에는 동치미에 넣을 고추를 만들었다. 커다란 항아리를 사서, 그 안에 고추를 넣고, 소금물을 끓여 넣었다. 나중에 다 큰 무를 그 안에 넣으면 동치미가 되는 것이다. 한겨울 따뜻한 방 안에서 내가 담근 차가운 동치미를 꺼내 먹는 상상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흐뭇하다. 
오원근(법무법인 청주로) 변호사
 
  삶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불행하게도 돈에 매몰된 도시 삶은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을 돈이 대신한다. 우리 몸과 마음이 진짜 즐겁고 행복할 일은, 감히 말하건대, ‘하나도’ 없다. 흙을 떠난 생명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동치미 단지에 넣고도 남은 고추는 밀가루에 무쳐 삶은 다음, 양념을 해 먹었다. 하루 종일 고추 속에서 살았다. 고추는 소화에 좋다. 우리가 자주 먹는 소화제인 ‘활명수’의 주성분인 캡사이신은 고추의 매운 맛에서 추출한 것이다. 객지생활을 하다 청주로 돌아온 지 5년째인데, 내 시력이 0.3에서 1.0으로 좋아졌다. 주된 이유는, 텃밭농사에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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