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이익이 납니까?”    “열 배는 나겠지”  “보석 장사를 하면 몇 배나 이득일까요?”  “임자만 잘 만나면 백 배도 가능하겠지.” “사람 하나를 도와서 왕 자리에 앉힌다면 그 이익은 어떨까요?”   “그야 헤아릴 수 없겠지.”

장사꾼 여불위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를 만난 뒤 아버지와 나눈 대화이다.
여불위는 전국시대 말기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는 전 재산을 투자하며 온갖 로비를 통해 결국 자초를 진나라 왕으로 만든 거상이다. 그러나 세간에서 그를 더욱 주목했던 것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자초가 조나라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달라고 하여 낳은 아들이 진시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즉위 3년 만에 자초는 세상을 떠났다. 여불위는 13세의 나이로 왕이 된 진시황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며 진나라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여불위는 어마어마한 땅을 소유하였고 1만 명이나 되는 노비를 거느렸으며 식객 3,000명을 총동원하여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여씨춘추>라는 불후의 명작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권모술수와 도박의 연속으로 진시황의 생모와 계속해서 정을 통했으며 진시황제가 점점 성장하자 후환이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에게 조희를 떠넘기기까지 했다. 결국 이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여불위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좌천되었다가 진시황제의 압력을 느끼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막장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여불위 이야기, 정말 사실일까? 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려는 한나라의 역사관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진시황의 괴팍한 성격과 폭정을 출신성분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기⟫역시 진시황의 비화를 채택해서 쓴 것을 보면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만했다고 생각되어진다.
여불위의 삶, 진나라의 중국 통일에 기여했고, <여씨춘추>를 발간하여 문화수준을 높였으며 막대한 정치자금을 투자하여 최고 권력까지 손에 쥐었으니 과연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을 등치는 것을 능사로 알았고 예의를 귀찮게 여기며 돈만 있으면 장땡이요 염치는 뒷전이었던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던 여불위의 삶을 요즘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청주역사문화학교/이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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