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날, 법을 흉보다

지난 4. 25.는 ‘법의 날’이다. 법의 날의 의미에 대하여 인터넷 사전은, ‘국민의 준법정신을 높이고, 법의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이라고 한다. 시민들 위에 존엄하신 법이 있고, 시민들은 이에 경외심을 갖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날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시민보다 우선하는 법의 존엄성이라는 취지에 최적으로 부합하는 법은, 아마도 박정희 군사 정권때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1호’일 것이다.

1972년 만들어진 유신헌법(제53조)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이라는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이에 대하여 국회와 사법의 통제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위 조항에 근거하여 1974년부터 시작하여 제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자신의 출생에 보답하듯 제1호로,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개,폐정을 주장하는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북한의 3대 세습 군주처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능의 권한을 부여하고,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시민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지고의 존엄을 부여하고 있으니, 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법만의 세상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가장 겸손한(?) 법도 갖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바로 현재도 무소불위의 위엄을 행사하는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 제1조 1항은 자신이 국가의 안전 등을 위하여 존재함을 규정하고, 2항은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 법률중 거의 유일하게, 본인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적시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겸손한 법인가 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는 이렇게까지 겸손을 떨어야 할 정도로 그 스스로가 치명적 오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가보안법은 우리 법률중 유일하게, 국가 그 자신에 위해를 줄 수 있는 범인을 보고도 단지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을 처벌할 수 있고(포상금만 놓치는 것이 아니다), 그 범인을 칭찬하였다거나 그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시민을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국가로부터 주어진 국민의 의무를 부정하였던 월든 호숫가의 철학자 헨리 소로우도, 국가의 철폐를 상상해보자고 노래한 존 레넌도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범죄자일 뿐이다.

국가의 안전을 빌미로 한 유신헌법이 긴급조치권이라는 괴물을 통하여 시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였듯이, 지금의 국가는 국가보안법을 통하여 시민들을 정신적으로 짓누르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반국가단체의 주장에 동조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흔히 상상하듯 그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을 모두 잡아갈 때, 나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더니, 이제 자신이 잡혀갈 때 아무도 항의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나찌 시대 신학자 마르틴 뇌묄러의 회한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자기기만의 무서움을 알 것이다.

법과 법치주의는 국가와 그가 내세우는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하여 심지어 ‘법’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법의 날은 이러한 법과 법치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지, 법 자신의 지엄성을 찬양하고 불온한 시민, 노동자에 대한 법의 엄정한 관철을 엄포하는 날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국가보안법’과 ‘법의 날’을 흉보아도 처벌을 받지 않으니, 지금의 법이 유신 때보다는 조금은 겸손한 셈이다.

 

※ 위 글은 4. 24.자 중부매일 ‘법의 날, 법을 흉보는 날이 되어야’ 칼럼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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