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부커치(不客氣)’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천만에요’, ‘별말씀을’에 해당하는데, 좀 더 자세히 뜻을 풀어보면 손님처럼 느끼지 말고 주인처럼 편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중국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이다.

<사기열전>에도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여 유명해진 인물이 있다. 바로 전국시대 말기 제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맹상군이다. 맹상군은 집에 찾아 온 손님이면 어떤 신분과 재주를 가진 사람이든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식객을 처음 맞이할 때는 그 부모 형제까지 기록해 두었다가 선물을 챙겼으며, 식사 때 주인과 손님의 밥상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귀천을 막론하고 잘 대해주었으므로 식객 개개인은 모두 자기가 맹상군과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인재들이 맹상군 문하로 몰렸으며 식객이 무려 수천 명을 이르렀기에 ‘식객삼천’이란 말도 생겨났다. 식객이란 군주에게 추천될 기회를 얻기 위해 재산가나 유력 인사의 집에 묵으면서 밥을 얻어먹고 지낸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계책을 내기도 하고 천하를 누비면서 정보 전달자의 역할도 했기에 식객을 많이 거느린 귀족들은 왕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맹상군이 여러 제후국 사이에서 무시 못 할 세력으로 떠오르자 진나라의 소왕은 맹상군이 어떤 인물인지 무척 궁금하여 사신을 보내 진나라로 초청했다. 처음에는 음모가 있을 거라는 식객들의 만류로 맹상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사양했으나 계속되는 초청으로 마침내 진귀한 선물을 준비하여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진나라에 도착한 맹상군 일행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진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는 대신들의 말에 진나라 소왕은 맹상군을 감금하고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맹상군은 자신의 석방을 위해 소왕이 아끼는 애첩에게 도움을 청했다. 애첩은 답례로 흰여우 가죽옷을 갖고 싶어 했는데 이미 그 옷은 진나라 소왕에게 선물로 바쳤기 때문에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때 식객 중 개 도둑의 명수라는 사내가 이 일을 해결하겠다며 나섰다. 그는 개 흉내를 내서 왕궁 창고에 숨어 들어가 옷을 훔쳐왔고 외투가 왕의 애첩에게 보내지자 맹상군 일행은 바로 석방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진나라 국경을 빠져 나가기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국경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이었고 당시 국경 관문의 법은 닭이 울어야 문을 열고 통행자를 내보냈기에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때 식객 중 닭 우는 소리를 잘 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닭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인근의 닭들이 모두 따라서 울었고 문지기는 날이 샜다고 여겨 문을 열어 주었기에 맹상군 일행은 무사히 진나라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개 도둑과 닭 울음의 흉내를 잘 내는 사내를 식객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모두 그 두 사람을 부끄러워했지만 이들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기에 모두들 맹상군의 사람보는 안목에 경의를 표했다고 하니, 여기서 생긴 고사성어가 ‘계명구도’이다.
송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대문호였던 왕안석은 맹상군열전을 읽고 계명구도하는 식객들 때문에 진정한 인재는 맹상군에게 귀의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사실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개 도둑질이나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들을 발탁하여 과연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은 “하늘이 나를 낳았을 땐 반드시 써먹을 곳 있으려니” 하였으니 오히려 요즘 같은 정보전과 첩보전의 시대에서는 계명구도는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또 평소엔 잘 쓰일 수 없는 남다른 재주를 이해하고 그 재능을 적재적소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인간관계를 맺은 맹상군의 안목이야말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 세상에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영순/청주역사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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